2018.03.14 12:42

[슈짐] 백야 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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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컬러버스+네임버스 짬뽕 세계관입니다.





♪Death Cab For Cutie - What Sarah Said




백야 A 

민윤기 박지민







 의료 자격증 갱신을 위한 검진을 시작합니다모든 문항에 거짓 없이 답하셔야 하며거짓임이 밝혀지면 의료 자격증을 비롯한 관련 자격을 모두 박탈당하게 됩니다또한, 10년 이하의 징역에 처할 수 있습니다이에 동의하십니까?

  ….

  검증을 시작하기에 앞서 성명과 자격번호를 말씀해주십시오.

  민윤기. K91993003.

  다음 저혈당 응급환자에 대한 올바른 처치방법은 무엇입니까?

  2.

  다음과 같은 증상을 보이는 환자에 대해 말씀하십시오.

  폐출혈 가능성이 높아 보이며.


……


  마지막 문항입니다현재 색이 보이십니까?

  …….

 

  별 망설임 없이 단조롭게 이어지던 윤기의 목소리가 멈췄다윤기는 입술이 바짝 말라오는 느낌에 한 손으로 마른세수를 하며 얼굴을 쓸어내렸다대답 없는 응시자를 기다리던 인공지능 감독관이 답을 재촉하며 경고의 메시지를 출력한다.


  다시 한 번 묻겠습니다현재 색이 보이십니까?

  …….


  윤기는 이번에도 대답하지 못했다흑백의 세상에 익숙해졌다고 생각했는데 쉽사리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반듯하게 의자에 앉아있던 몸을 앞으로 숙인 채로 윤기는 괴상한 모형들이 둥둥 떠다니는 모니터를 바라봤다명도의 차이로 봐서는 서로 다른 색으로 여겨지는 모형들은 윤기의 눈엔 그저 무채색일 뿐이었다.


  마지막입니다미응답 시 부정의 뜻으로 제출하도록 하겠습니다현재 색이 보이십니까?

  …….

  자격번호 K91993003에 대한 자격 갱신을 불허합니다앞으로의 모든 의료 집도 행위에 대해서 제한을 받으며 이를 어길 시 15년 이하의 징역에 처할 수 있습니다.


  윤기는 더 들을 것 없다는 듯 자리에서 일어났다윤기에게 밀린 의자가 뒤로 미끄러지듯 밀려났다홀로 떠들고 있는 인공지능을 잠시 노려보던 윤기가 미련 없이 뒤돌아서 시험장을 빠져나왔다.



 

  마지막에는 어차피 시각세포와 시신경 검사가 이루어지는데 구태여 색이 보이냐 묻는 의도가 대체 뭐냔 말이다윤기가 똥 씹은 표정으로 얼굴을 구긴 채 중얼거렸다굳이 입 밖으로 색이 보이지 않음을 꺼내며 사실을 인지하란 거야뭐야재수 없는 놈들단정하게 매여 목을 죄어오던 넥타이를 풀어내며 비속어를 짓씹었다그래도 기분이 전혀 나아지지 않았다.


  의사라는 직업을 잃음과 동시에 하루하루 희미해지다가 이제는 흔적조차 남지 않게 된 손목 안쪽의 이름이 완전히 유실됐음을 통보받았다이제는 무던해진 아픔이라고 생각했는데 손목 위가 다시 욱신거리는 것 같았다윤기는 왼쪽 손목을 감싸 쥐었다색이 사라진 첫날은 정말 지옥에라도 떨어진 것 마냥 괴로웠었는데 얼마나 지났다고 이제는 흑백의 세상이 자연스러웠다오래전 끊었던 담배의 생각이 간절해지는 날이었다.


  윤기는 곧바로 병원으로 향했다자신의 세상을 찬란하게 만들던 색을 잃은 날 이후로는 처음이었다사람이 북적이는 로비를 지나는 동안 자신에게 꽂히는 시선을 모르는 것은 아니었지만일일이 신경을 쓸 기력도 남아있지 않았다윤기는 묵묵히 오랜 기간 비어 있었을 자신의 방을 향해 걸었다.


  수술실에 출입하지 못하게 된 의사들의 이야기는 종종 들려와 이제는 특별할 것 하나 없는 소재였지만여전히 남 얘기하기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관심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몇 호의 방주인이 바뀌었다거나멀쩡하게 진료를 계속하던 옆 방 동료가 수술실에 들어가기 전 출입이 거부되었거나 하는 이야기들은 윤기가 궁금해하지 않아도 알게 되었었다곧 자신의 이야기도 그렇게 퍼질 것을 생각하니 피곤함에 찌들어있던 하얀 얼굴이 휴짓조각처럼 구겨졌다.


  “어머민 선생님!”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두 발자국을 내디뎠을까 싶은 순간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귓속을 파고들었다윤기는 잔뜩 피곤한 표정을 지은 채 발걸음을 서둘렀지만 채 5m도 가지 못해서 붙잡히고 말았다.


  “뭡니까?”


  짜증이 섞인 목소리가 형편없었다그러거나 말거나 윤기를 불러세운 간호사는 푸석해진 윤기의 얼굴을 보고 호들갑을 떨어댔다.


  “세상에얼굴 상하신 것 좀 봐.”

  “괜찮습니다김 간호사님한가하신가 봅니다?”

  “어휴그럼요민 선생님 방에 줄을 서던 환자들도 없어서요이제 다시 나오시는 거예요?”


  적당히 하고 그만 가라는 의미였는데 말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인 김 간호사 때문에 윤기는 머리가 지끈거리기 시작했다.


  “아뇨방 비우려고 왔습니다.”

  “?”


  두통이 오기 시작하는 머리를 붙잡은 채 건조한 어조로 대답하자마자 복도 가득 놀란 김 간호사의 목소리가 울렸다윤기는 이쪽으로 집중되는 시선에 작게 한숨을 내쉰 후 몸을 휙 돌려 자신의 방으로 향했다뒤에서 어머어머세상에!” 같은 말이 들려왔지만 무시했다지금의 윤기로서는 다른 사람을 상대할 수 있는 기력이 남아있지 않았다.


  소식을 퍼 나르는 것에 있어서 12층에선 따라올 사람이 없던 김 간호사였으니 자신의 소식이 병원 한 바퀴를 도는 것엔 채 반나절이 걸리지 않을 것을 윤기는 잘 알고 있었다문이 닫히자 소란스러워지기 시작한 복도가 마치 다른 세상처럼 차단됐다문에 기대선 윤기는 마른세수를 하며 한 달 가까이 비어 있던 자신의 방을 돌아봤다.


  흉부외과 전문의 민윤기정갈하게 쓰인 명패의 이름을 바라보던 윤기가 바람 빠진 소리를 내며 웃었다짐을 담아갈 수 있는 상자가 책상 위에 덩그러니 올라가 있었다이럴 때만 참 빠르지헛웃음을 지은 채로 윤기는 서랍을 열어 닥치는 대로 상자 안에 담았다긴 시간 머무른 것치곤 보잘것없는 짐이었다.


  남들보다 조금 더 좋았던 머리는 고등학교를 빨리 졸업하고 나아가 전문의를 이름 석 자 앞에 더 빨리 붙여주었다지금 와선 그게 다 무슨 소용인가 싶었다.


  색을 모르고 태어나서 신체 어딘가에 타인의 이름이 새겨지면 사람들은 색을 각성한다그 이름은 생전 처음 보는 이름일 수도 있었고 아는 이름일 수도 있었다이미 뜨거운 사랑을 진행 중인 연인들이 서로의 이름을 지닌 경우도 종종 있었다그렇게 한 번 새겨진 운명의 이름은 지울 수 없었다억지로 지우고자 한다면 지울 수 있었지만그 부작용이 몹시도 컸기에 법적으로도 금지되는 행위였다이름이 지워지는 경우는 딱 한 가지뿐이었다이름 주인의 죽음윤기는 환하게 웃고 있는 자신과 A의 사진이 담긴 액자를 한참이고 쓸어내렸다다 정리가 되었다고 생각했는데 왼쪽 손목이 또 시큰거렸다.


  윤기는 액자를 뒤집은 채로 짐 더미 위로 올렸다단출한 짐의 가장 위는 이제는 쓸모가 없어진 명패가 차지했다책장을 가득 채운 서적들은 나중에 따로 보내달라고 할 생각이었다책상을 한 손으로 짚은 채 그래도 정이 들었던 방을 둘러보았다처음 이 방에 들어오던 순간부터 매 순간이 빠지지 않고 빼곡하게 기억났다방보다는 수술실에 있는 시간이 더 많았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쓸데없는 상념에 더 젖기 전에 돌아갈까 싶어 상자를 들어 올리는데 달칵거리며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찾아올 이가 없는데조금 의아한 얼굴로 윤기는 뒤를 돌아섰다.


  “!”


  문을 열고 숨을 헐떡이며 뛰어들어온 남준을 보며 윤기는 자신의 곁에 얼마 남지 않은 주변인들을 떠올렸다남준은 아주 깊고 협소한 윤기의 인간관계에 있어서 큰 부분을 차지하는 사람이었다.


  “웬일이냐.”

  “웬일이라뇨이게 무슨 소리예요.”

  “뭐가.”


  윤기는 들어 올렸던 상자를 다시 책상에 내려놓으며 무미건조한 목소리로 대답했다문을 닫고 방 안으로 성큼성큼 걸어들어온 남준이 설명을 요구하는 눈빛으로 윤기를 바라봤다한달만에 나타난 윤기는 병원을 떠난다고 했다남준의 시선이 상자 안 윤기의 명패에 꽂혔다.


  “가긴 어딜 가요.”

  “그럼 가야지별수 있냐?”

  “그래도 이렇게 급히!”

  “남들보다 조금 빨리 왔던 거 빨리 간다고 생각해.”

  “.”


  남 일 얘기하는 듯 덤덤한 윤기의 말투에 화가 나는 것은 남준이었다그 고통을 다 헤아릴 수는 없어도 자리를 비웠던 한 달이라는 시간이 윤기에게 있어서 얼마나 힘든 시간이었을지 정도는 알았다그래도 이렇게 한마디 언질도 없이 떠날 생각을 하는 줄은 몰랐다적어도 자신에게 한 마디 정도는 해줄 줄 알았기에 못내 서운한 마음이 울컥 목구멍까지 차올랐다.


  “형 진짜어떻게 한마디 말도 없이 이러냐.”


  자신의 어깨를 붙잡은 채 고개를 푹 숙이고 화인지 서운함인지 어쩌면 그 둘 다인지 모를 감정을 토해내는 남준을 윤기는 말없이 바라봤다그러고는 오늘따라 좁아 보이는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이게 뭐 축하받을 일도 아니고 동네방네 떠드냐.”

  “…….”

  “형 먼저 간다너는 오래 해먹다 와라.”

  “괜찮은 거예요?”


  말이 없는 남준을 두고 상자를 품에 안은 채 지나치려는데 잔뜩 가라앉은 목소리가 윤기의 발목을 붙잡았다.


  “?”

  “이제 형은 괜찮은 거냐고요밤에 잠은 잘 자요?”

  “…….”


  윤기는 말없이 못 본 사이 수척해진 남준의 얼굴을 바라봤다.


  “잠은 내가 아니라 네가 자야겠다.”

  “자꾸 말 돌리지 말고요.”

  “잘 잔다이렇게 잘 자도 되나 싶을 정도로 엄청 잘 자.”

  “그럼 됐어요.”

  “그 말이 그렇게 듣고 싶었냐너 직업병이야그거.”

  “친한 형 건강 걱정하는 게 무슨 직업병이에요.”

  “잘 먹고 잘 자고 있으니까 걱정하지 마라그만두니까 세상이 평화롭더라그래도 넌 오래오래 남아 고생해.”

  “덕담이에요그거?”


  피식 웃음이 터진 남준의 얼굴을 바라보며 윤기가 어깨를 으쓱했다좋을 대로 생각하라는 뜻이었다.


  “간다.”


  떠날 때까지도 민윤기는 민윤기였다남준은 피식 올라오는 웃음을 꾹 참은 채 방문을 열고 있는 뒷모습을 향해 물었다.


  “형 이제 뭐 할건데요?”


  윤기는 답 없이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 방 안을 돌아봤다아무 계획이 없어 보이는 표정이었다.


  “글쎄다.”


  그러고는 주인을 잃은 빈방에 남준만 덩그러니 남겨놓은 채 복도 저편으로 걸어가 버렸다.



*   *   *



  짐을 들고 가는 자신을 향해 따라붙는 시선에 차로 돌아오자마자 윤기는 지쳐버렸다무슨 남한테 관심들이 그렇게 많아서는구시렁거리며 시동을 건 채로 핸들을 붙잡고 잠시 병원 건물을 바라봤다좋으나 싫으나 자신의 의사 인생 전부를 함께 한 곳이라 그런지 정이 든 모양이었다비록 흉부외과 사람 좀 더 들이라는 자신의 말을 귓등으로도 듣지 않던 곳이긴 했지만윤기는 쯧쯧 혀를 차며 고개를 작게 젓다가 별 미련 없이 차를 몰았다.


  앞으로 뭘 하며 살지는 생각해보지 않았다남준이 묻기 전까진 아예 자각조차 하지 못했던 사항이었다아는 사람 하나 없는 해외로 여행이나 갈까 하는 생각은 귀찮다는 이유로 떠올린 지 10초 만에 폐기되었다그럼 국내 여행이나 가지 뭐바다나 보러 갈까 싶어 목적지는 부산으로 정해졌다다음 계획도 하나 정해졌겠다일단 오늘은 집에 가서 늘어지게 잠이나 한숨 잘 생각이었다.

 



  집에 도착한 윤기는 들고 온 상자를 그대로 들어서 서재 책상에 올려두었다지금 정리하지 않으면 아마도 먼 훗날에야 정리하게 될 것을 직감했지만 당장은 손 하나 깜짝하기도 싫었다별 미련 없이 서재 문을 닫은 윤기는 답지 않게 온종일 단정히 매고 있었던 넥타이를 풀어내며 욕실로 향했다어딘가에 묶여있었던 적은 없다고 생각했는데 지금 머리부터 발끝까지 온몸을 지배하고 있는 것은 어째서인지 해방감이었다.


  제대로 사직서를 써 원장의 얼굴에 던지고 나오지 못한 점이 아쉬웠지만그 점만 빼면 아주 만족스러웠다밤낮 할 것 없이 뛰어다니지 않아도 됐고집에도 들어오지 못해 의국 간이침대에 몸을 뉘이지 않아도 됐다.


  쏟아지는 물줄기를 맞으며 윤기는 한 톨의 미련도 남기지 않고 모두 씻겨 내려갔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먼저 온 만큼 먼저 가는 것뿐이다병원에서 남준에게 했던 말은 스스로에게 하는 말이기도 했다.


  한 달 전까지는 거의 매일 밤을 병원에서 보내다시피 했었고지난 한 달은 차마 텅 빈 집에 머물 자신이 없어 호텔 방들을 전전했었다냉한 기운이 감도는 침대에 누운 채로 윤기는 눈을 감았다자고 일어나면 괜찮아지기를 비는 스물한 번째 밤이었다.



 

  안녕.

  윤기는 눈을 번쩍 떴다해가 뜨기 전인지 아직 주변이 깜깜했다턱 끝까지 차오른 숨을 헉헉 내쉬며 자리에서 일어난 윤기는 축축한 눈가로부터 떨어지는 눈물방울을 느끼고는 서둘러 손으로 훔쳐냈다뺨까지도 축축하게 젖어있었다.


  머리맡의 시계는 새벽 3시를 가리키고 있었다한 번 깬 이상 다시 잠들기 어렵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윤기는 침대에서 비척비척 몸을 일으켰다기왕 이렇게 된 거 어제 흘러가듯이 생각했던 부산 여행을 떠나버릴 심산이었다.


  느긋하게 양치를 하고 세안까지 마친 윤기는 옷가지 몇 개만 달랑 담은 가방을 챙겨 방에서 나왔다밖은 여전히 깜깜했다시동을 걸고 보니 5시도 되지 않은 시간이었다숙소도 예약은커녕 알아보지도 않았고 며칠이나 있을지 어디를 갈지 계획 하나 없는 여행이었지만 불안감이란 손톱의 때만큼도 존재하지 않았다있고 싶은 만큼 있으면 되는 거고 적당히 머물고 싶은 숙소에서 머물면 되는 거였다직장을 그만둔 백수에게는 넘치는 여유뿐이었다.


  그러다 돈과 시간이 넘치던 백수 민윤기는 문득 운전하는 것이 귀찮아졌다굳이 서울에서 부산까지 차를 끌고 갈 필요가 있을까시동을 걸어둔 채로 핸들을 붙잡은 윤기는 생각에 빠졌다잠시 후 결론을 내린 듯 윤기는 짐을 챙겨 차에서 내렸다그리고 택시를 부르는 어플을 켰다.




  아무리 여유가 넘치는 상태라고 해도 서울에서 부산까지 택시를 타고 갈 정도로 미치지는 않았다서울역에 내린 윤기는 가장 빠른 기차표를 끊고 너무 이른 시간이라 음식점들도 문을 열지 않아 한산한 역사를 둘러봤다기차 시간까진 아직 시간이 꽤 남아있었기에 할 일 없이 의자에 앉아있던 윤기는 자신의 단출한 짐가방을 바라보며 너무 대충 챙긴 건 아닌가 생각했다부산역에 내려서 어디로 갈지조차 생각해보지 않았다윤기는 뒷머리를 긁적이다 급히 휴대폰을 키고 검색창을 열었다.


  부산 명소부산 관광지부산 맛집같은 검색어들을 주르륵 검색해보던 윤기는 이내 이게 다 무슨 소용인가 싶어 한숨을 푹 쉬며 의자에 기대 천장을 올려다봤다그냥 내리면바다나 가지 뭐잘 짜인 길을 걸어오고 정교한 수술을 수없이 한 사람치고는 대책 없는 계획이었다.


  마지막으로 보았던 시리도록 아름다운 바다가 떠올라 무작정 바다를 보러 부산을 목적지로 정했었는데 생각해보니 이제는 그 아름다움을 보지 못할 것이었다색이 없는 흑백의 세상에선 아름답게 빛나던 것도 그 빛을 잃었으니까허탈한 웃음을 짓던 윤기는 타야 하는 기차가 승차 준비를 시작한다는 전광판을 보곤 자리에서 일어났다색을 잃었다고 해서 햇빛에 반사되어 반짝거리는 걸 보지 못하는 건 아니었으니까.

 


*   *   *



  선잠을 자며 깨기를 수십 번어느새 부산에 도착했다윤기는 피곤한 눈가를 꾹꾹 누르며 짐을 챙겨 기차에서 내렸다확실히 서울하곤 공기가 다른 것도 같았다오랜 시간 열차 좌석에 구겨져 있던 몸을 쭉쭉 편 윤기가 하품하며 걸음을 옮겼다진짜 부산에 와버렸다아무런 계획도 없이.


  일단 바다가 목적이었으니 바다로 가긴 가야 할 텐데 문제는 윤기는 부산에 딱 두 번밖에 와보지 않았으며 그마저도 긴 시간을 머무른 것이 아니었다운전하는 것이 귀찮아서 기차를 탔는데 막상 여행지에 도착하니 차가 없는 게 또 아쉬웠다부산 바다하면 해운대밖에 떠오르지 않았던 윤기는 대충 택시나 잡아타자는 생각으로 평소보다 배는 여유로운 발걸음을 옮겼다.


  8시가 넘는 시간이 되니 역사에도 사람들이 꽤 보였다느긋하게 플랫폼을 빠져나와 택시정류소로 향하며 광장을 가로지르는데 몇 시간 자지 못한 상태에서 기차 안에서 불편하게 선잠을 잔 것이 전부라서 그런지 하품이 밀려왔다윤기는 잠시 멈춰서 고개를 숙인 채 하품했다.


  눈가에 눈물을 매단 채 고개를 드는데 이쪽으로 급하게 달려오는 사람이 보였다윤기는 혹여 부딪혀 다칠까 싶어 몸을 옆으로 틀어 섰다윤기가 몸을 튼 덕분에 남자는 부딪히지 않고 윤기를 지나쳤다무슨 급한 일이 있길래스치듯 본 남자는 앳되어 보였는데 그 표정이 꽤 절박해 보였다기차 시간이라도 아슬아슬한가 보지 뭐대수롭지 않게 생각한 윤기가 한 발자국을 내디뎠을 때 뒤에서 쿠당탕거리는 소리와 사람들이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소리에 놀라 뒤를 돌아보니 방금 윤기를 지나쳐갔던 남자가 땅에 쓰러져있었다단순히 넘어진 거라기엔 어딘가 괴로워 보이는 모습에 윤기가 표정을 굳힌 채로 남자에게로 다가갔다응급환자일 수도 있는 일이었다어느새 모여들어 저마다 괜찮냐는 말을 건네는 인파를 헤친 윤기가 바닥에 쓰러져있는 남자의 손목을 붙잡았다맥박은 정상적이었다.


  “의사 선생님이쇼?”


  주변에 몰려있던 행인 중 한 명이 윤기에게 물었다.


  “뭐 비슷한 겁니다.”


  무심코 의사임을 긍정하려던 윤기가 멈칫했다남자는 옆구리와 골반이 있는 쪽을 부여잡으며 통증을 호소하고 있었는데 윤기가 몸을 바로 눕히려고 몸을 붙잡자마자 갑자기 가슴을 움켜쥐며 밭은 숨을 내쉬었다이게 대체 무슨의심 가는 여러 증상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지만 그렇다기엔 맥박이 너무나도 평화로웠다윤기가 혼란스러운 얼굴로 남자를 내려다봤다가슴을 퍽퍽 치며 숨쉬기를 힘들어하는 모습이 심상치 않아 바로 눕히고 기도를 확보하고 싶었는데 남자는 윤기의 손이 닿을 때마다 발작하듯 고통을 토해냈다.


  “비키십시오의사입니다!”


  주변에 도움을 청하려던 차에 지나가던 의사가 있었는지 행인들 사이를 비집고 들어왔다윤기는 엉거주춤한 자세로 남자에게서 손을 뗐다그러자 방금까지 숨이 넘어갈 것 같던 남자의 호흡이 놀라울 정도로 지정되기 시작했다의사는 윤기를 의아한 얼굴로 바라보았다진짜 의사도 왔겠다 자신이 이곳에 더 머물 필요가 없다고 판단된 윤기는 의사에게 작게 묵례를 한 후 자리에서 일어나 아까보다 두 배는 많아진 인파를 헤치고 나왔다.


  정신 차리자이제 의사도 아닌 게한숨을 푹 쉬며 택시정류소로 향하는 윤기의 발걸음이 영 힘이 없어 보였다.


  “해운대요.”


  정류소에서 대기하고 있던 택시 한 대에 올라탄 윤기는 목적지만 툭 던져놓고 창밖을 바라봤다분명 맑았던 것 같은데 우중충한 것이 예감이 좋지 않았다아까 그 남자가 쓰러진 원인은 뭐였을까골절이라 보기엔 모호했고 그렇다고 다른 증상이라 생각하기에도 걸리는 점이 한둘이 아녔다남자의정확히는 남자의 증상에 대한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 무렵 윤기는 문득 내가 왜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지에 대해 회의감을 느꼈다그래이제 의사도 아닌데길거리에서 쓰러지는 사람을 봐도 여타 평범한 사람들처럼 어머어떡해.’ 하며 발을 구르거나 구급차를 부르거나그것도 아니라면 간단한 심폐소생술 정도나 해주면 되는 일이었다의사도 아니니까.

 



  해운대에 도착했을 때는 사방이 어두컴컴했다혀를 찬 윤기는 바람까지 쌩쌩 불기 시작하는 해변을 둘러보며 못마땅한 얼굴로 머리를 헤집었다윤기의 세상은 색을 잃었기에 바다가 햇빛을 반사하는 반짝임을 보지 못한다면 바다를 보러온 의미가 없었다별 미련 없이 등을 돌린 윤기는 호텔로 목적지를 틀었다그냥 푹신한 침대에 누워 쉬고 싶었다.


  호텔에 도착한 윤기는 성수기가 아님을 감사하며 빈방에 체크인했다방에 들어오자마자 외투를 벗어 의자에 걸쳐둔 윤기는 침대 위로 몸을 던지듯 누웠다마음 편하자고 충동적으로 온 여행인데 어째 마음이 더 불편하기만 했다한숨을 푹푹 내쉰 윤기는 갑작스레 밀려오는 피로감을 이기지 못하고 누운 자세 그대로 잠들었다.



*   *   *


 

  잠에서 깨어난 것은 벨 소리 때문이었다윤기는 오랜만에 꿈도 꾸지 않는 단잠에 빠졌던 터라 작게 욕을 읊조리며 눈을 떴다베개로 귀를 막아봐도 두꺼운 솜을 뚫고 들리는 벨 소리에 결국 참다못해 일어나 앉은 윤기가 세 번째로 울리기 시작하는 핸드폰을 노려보다가 짜증 가득한 손길로 잡아챘다.


  ‘김남준


  액정에 떠 있는 이름 석 자를 확인한 윤기가 짜증 섞인 한숨을 내쉬며 전화를 받았다.


  “.”

  — 앞으로 뭐 할지 계획 없다고 했죠?

  “없었는데 방금 하나 생겼다.”

  — 뭔데요?

  “널 죽이는 거.”

  — 갑자기 나는 왜요.


  스산한 윤기의 목소리에서 진심이 뚝뚝 묻어났기에 남준은 수화기 너머로 대화하고 있음에도 몸을 부르르 떨어야만 했다거칠게 앞머리를 쓸어내린 윤기가 후하고 깊게 숨을 내쉬었다.


  “그래서 용건이.”

  — 맞다.

  “빨리 말해진짜 너 잡으러 올라가기 전에.”

  — 올라와형 지금 어디예요?

  “부산.”

  — 부산거긴 왜 갔어요?

  “여행 왔다여행내가 부산을 올게 여행말고 더 있냐?”


  결국 폭발한 윤기의 분노에도 남준은 아하는 영구 박 터지는 소리를 냈다.


  “용건.”

  — 맞다.

  “자꾸 아맞다 할래진짜 너 잡으러 올라간다.”

  — 여행 간 김에 더 즐겨야죠무슨 소리예요.


  자꾸 대화가 옆으로 새는 기분에 뻐근한 고개를 이리저리 돌린 윤기가 최대한 화를 누그러뜨린 목소리로 마지막 기회를 남준에게 주었다.


  “용건만 말해라마지막이다.”

  — 잠시만요형 어차피 앞으로 뭐 할지 안 정해졌으면 그교육원에 한 번 가보지 않을래요?

  “…….”

  — 물론 형한테 교육 다시 받아라그런 건 아니고!

  “그건 나도 알아새꺄.”

  — 색이 안 보인다고 의료계통 일을 다 못하는 건 아니잖아요.

  “…….”

  — 형 그냥 이렇게 아무것도 안 하고 그만두기엔 형이 너무 아까워요.

  “후우.”

  — 당장 정하란 건 아니고요형도 생각을 좀 해야지은퇴하고도 교육원 가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이 바닥에 깔린 건 형도 알죠솔직히 색 때문에 자격 정지 먹은 사람한테는 최고의 자리잖아요일부러라도 가고 싶어 하는 곳인데.


  남준의 말에 틀린 것은 없었다의료 교육원은 현직에 있는 의료진들도 어느 정도 나이가 되면 가고 싶어 하는 곳이었으며 윤기같은 사람에게 있어서 최고의 직장이기도 했다색을 잃은 의사들은 자격을 정지당하고 난 후 전혀 다른 길을 찾거나 연구소를 들어가거나 혹은 조수로 들어가거나 했는데 교수 직함을 달고 의료 교육원에 들어가는 것은 꿈과 같은 일이기도 했다워낙 티오 자체가 나지 않는 곳이기도 했고 기본적으로 전문의학 박사직을 달고 있었어야 갈 수 있는 곳이었다.


  — 듣고 있어요?

  “…….”

  — 윤기형!

  “귀 안 먹었다.”

  — 그럼 대답을 좀 하지.


  잠시간의 고민 끝에 결론을 내린 윤기는 단호한 목소리로 남준에게 자신의 뜻을 전했다.


  “싫어.”

  — ?

  “싫다고.”

  — 뭐가요대답하는 게 싫다고?


  이런 어벙한 대답을 하고 있는 사람이 신경외과 쪽에서 수재 소리를 듣고 있는 현실이 윤기는 문득 안타까워져서 혀를 끌끌 찼다.


  “싫어안 가.”

  — 왜요.

  “내가 무슨 애들을 가르치냐.”

  — 형 거기 애들 아니에요나이가 다 몇인데.

  “아무튼새꺄내가 남 가르칠 위인으로 보이냐?”

  — 아니그렇진 않은데의외로 형이랑 잘 맞을 수도 있고또 연구나 이런 건 계속할 수 있잖아요.

  “내가 딱히 그런 거에 욕심 있는 것도 아니고됐어안 한다.”

  — 아니 이런 기회를 그냥 차 버리는 사람이 어딨어요?

  “정시출근 언제 퇴근할지 모르는 삶 지겹다 지겨워.”

  — 여기는 병원 아니라서 그런 거 없어요정시출근 정시퇴근 강의 없는 날은 휴일 보장!


  꼭 교육원 홍보 대사 같이 말하는 남준 때문에 피식 웃음이 터진 윤기는 곧 언제 웃었냐는 듯 표정을 굳히고 고개까지 저어가며 거절했다.


  “싫어싫어안 해애새끼들 싫어!”

  — …형이 더 애 같구먼.

  “너 뭐랬냐 지금.”

  — 귀는 왜 이렇게 또 밝아요?

  “뭐랬냐고.”

  — 민윤기천재짱짱맨뿡뿡 이라고 했어요왜요!

  “참나.”


  말 같지도 않은 소리를 하는 남준이었지만 그게 싫은 것은 아니었기에 윤기는 피식피식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웃었다.


  — 아무튼그냥 거절하지 말고 여행 가서 좋은 거 많이 보고 맛있는 거 많이 드시고 생각 한번 해보세요진짜 다신 없을 기회다.

  “알겠어바쁜데 그만 끊고 가서 일 봐.”

  — 안 그래도 일 때문에 치여 죽는 사람한테 가서 일하라는 건 대체 무슨 심보ㅇ.


  구시렁거리는 남준의 말을 더 들을 가치가 없다고 생각했는지 윤기는 가차 없이 전화를 끊었다의료 교육원이라전혀 생각지도 않았던 단어가 윤기의 삶에 끼어들었다.


  그냥 누워있자니 더 답답하기만 할 것 같아서 윤기는 창가로 자리를 옮겼다바다가 보이는 방은 한 달 전의 윤기가 왔다면 전망이 좋다고 만족했겠지만지금의 윤기에겐 벽으로 막힌 풍경이나 바다가 보이는 풍경이나 별반 다를 것이 없었다.


  한참을 창가에 서 지나다니는 사람들 머리통이나 내려다보고 있던 윤기는 이렇게 땅굴만 파고 들어갈 수는 없다는 생각에 비장한 표정으로 겉옷을 챙겨 일어났다.



 

  근처 카페라도 갈 생각이었는데 윤기가 호텔을 나오기 무섭게 캄캄하던 하늘이 거짓말같이 맑게 개었다무슨 날씨가 이렇게 롤러코스터 같아꼭 제 상태 같아서 썩 기분이 좋진 않았다그래도 쨍쨍하게 나기 시작한 해에 만족스러운 표정을 한 윤기가 해변을 향해 부지런히 걸었다.


  해변에 도착해 햇빛을 반사에 반짝거리는 바다를 보고 있으니 마음에 평안함이 오는 것 같았다한참을 멍하니 앉아 반짝이는 파도를 바라보던 윤기는 부산 여행에 이어 또다시 충동적으로 다음 계획에 관해 결정을 내렸다그래사람이 밥은 벌어 먹고살아야지.


  안 하겠다고 으름장을 놓은 지 세 시간도 되지 않아 전화를 거는 것이 민망하긴 했으나 원래 윤기는 그런 면에선 뻔뻔한 사람이었다.


  — 여보세요?


  신호음이 간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전화를 받는 남준의 목소리에 자신의 인생을 이렇게 충동적으로 결정해도 되는가한 번 더 생각을 해보자.’ 싶었던 윤기는 이놈의 신경외과는 맨날 사람 없다면서 뭐 이렇게 한가해?” 하며 투덜거렸다.


  — 여보세요윤기형?

  “나 그거 한다.”

  — ?

  “간다고교육원 교수직.”

  — 진짜요잘 생각했어요!

  “대신 조건이 있어.”

  — 조건요?

  “주 3회만 수업을 할 것나머지 4일에는 날 찾지 말 것연장근무 없음무조건 정시출근몸 아프면 쉴 거야.”

  — 그건 제가 아니라 교육원쪽에 잘 말해보시고아무튼 하기로 마음먹은 거 진짜 잘한 거예요형은 잘할 거야.

  “그래가서 일 봐라일없냐무슨 전화를 걸자마자 받아.”

  — 아니 그건.


  남준의 말을 듣지 않고 이번에도 먼저 끊은 윤기는 한결 후련해진 마음으로 파도가 넘실거리는 바다를 바라봤다오래 앉아있으니 햇볕이 따가웠다그만 돌아갈까서울.



*   *   *


 

  그렇게 생각해놓고 윤기는 일주일간 부산에서 머물며 호텔 방에서 빈둥거렸다필요한 옷은 그때그때 사 입으며 맛집이란 맛집은 죄다 검색해 먹으러 돌아다니며 꽤 만족스러운 생활을 즐긴 윤기는 별 미련 없이 서울행 기차에 몸을 실었다.


  집을 떠날 때보다 짐이 두 배는 되어서 돌아왔다대부분이 옷가지뿐인 짐가방을 방에 대충 둔 윤기는 서둘러 샤워를 하고 멀끔한 정장으로 갈아입었다쇠뿔도 단김에 빼랬다고 올라오는 기차 안에서 교육원 쪽과 미팅을 잡은 채였다.


  오랜만에 입는 몸에 딱 붙는 정장을 어색하게 매만지며 거울을 돌아보던 윤기가 과연 잘하는 건지 한숨을 푹 내쉬었다손해 볼 것은 없었지만 어째서인지 께름칙했다뭐가 께름칙하냐고 물으면 답을 할 말이 없다는 것이 문제라면 문제였다그냥 다섯 번째 감각이 적신호를 쏘고 있는 것 같다는 말밖엔. (전직의사가 하기엔 다소 이상한 말이긴 했다.


  미팅은 교육원에서 하기로 했다국내에서 가장 역사가 깊고 우수한 인재를 많이 배출한다는 서울 국립 의료 교육원은 멀리서 보면 수용소 같은 분위기를 풍기기도 했다윤기는 깔끔하게 차를 주차하고 나와 차의 유리창을 통해 마지막으로 옷매무시를 가다듬은 후 교육원 안으로 향했다수업 중인 건지 건물 안은 조용했다차근차근 건물을 둘러보며 미팅장소에 도착했을 때는 정확히 약속 10분 전이었다자신의 완벽한 시간 계산에 만족한 듯 윤기는 한결 기분 좋아 보이는 표정으로 회의실 문을 열었다대체 교육원에 회의실이 왜 필요한지는 모르겠지만.


  회의실 안은 텅 비어 있었다적당한 자리에 의자를 빼고 앉은 윤기가 주변을 둘러보았다조금 으스스해 보이는 외관에 비하면 내부는 굉장히 깔끔했다얼마 전에 싹 리모델링을 했다더니 이 정도면 마음에 들었다.


  윤기가 그렇게 건물을 품평하고 있는 사이 회의실 문이 열리고 관계자 두 명이 들어왔다교육원장과 행정처 직원이었다윤기는 자리에서 일어나 정중하게 인사했다.


  “자네가 와준다고 한 말을 들었을 때 정말 기뻤다네.”

  “하하그러셨습니까.”

  “인재를 그렇게 잃는 것은 정말 슬픈 일이지.”

  “인재라뇨과찬이십니다.”

  “운명의 장난이라는 게쯧쯧.”


  윤기는 어설프게 웃어 보였다원장은 그대로 10분은 자기 할 말만 떠들어댔고 속으로는 지루해 죽을 것 같으면서도 얼굴만은 미소를 잃지 않은 채로 윤기는 적당히 맞장구를 쳤다


  “그래서 이제 본론으로 돌아와서들어보니 계약 조건이 있다고?”

  “거창한 건 아닙니다.”

  “어디 말해보게나.”


  숨을 한 번 고른 윤기가 한 호흡에 자신의 요구 조건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수업은 주 3회만나머지 4일에는 절 찾지 않았으면 합니다연장근무 없이 무조건 정시출근할 것이며 몸이 아프면 쉬고 싶습니다.”


  윤기가 말을 마치고 스스로 뿌듯한 표정을 원장과 직원은 조금 놀란 눈으로 윤기를 바라봤다.


  “거창한 건 없죠?”

  “그래쉬엄쉬엄해야지아프면 쉬고.”

  “그럼 제 조건은 받아주시는 겁니까?”

  “그래그래야지!”

  “좋습니다제시해주신 급여와 조건 훑어봤는데 그 부분에서는 정말 과분할 정도로 좋은 조건을 주셔서.”

  “그 정도는 당연히 해줘야지.”

  “감사합니다그럼 바로 도장 찍겠습니다.”

  “허허화끈해서 좋구먼그래.”

  “제가 그런 소리 가끔 듣습니다.”


  비즈니스적인 미소를 지어 보인 후 윤기는 계약서에 도장을 쾅쾅 찍었다학기가 시작된 지 얼마 되지 않아 아직 수강과목이 확정되지 않았기에 망정이었다부산에 있을 때 호텔 방에서 탱자탱자 놀면서도 틈틈이 준비했던 교과목에 대한 설명서를 건네는 것을 끝으로 미팅은 종결되었다.


  “이번 주에 강의가 열리고 다음 주부터 수업하는 거로 알고 있는데 맞습니까?”

  “그렇게 해주시면 됩니다.”

  “좋습니다제 방은 어디죠?”

  “절 따라오시면 됩니다.”


  사무적인 직원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윤기는 원장이 내미는 손을 붙잡고 악수했다.


  “불러주셔서 영광입니다.”

  “아닐세우리야말로 와줘서 고맙지.”

  “그럼 먼저 가보겠습니다.”


  깍듯하게 인사를 한 후 먼저 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는 직원을 따라나섰다얼마 가지 않은 곳에 자신의 방이 있었다명패는 언제 준비했는지 자신의 이름 석 자가 박힌 명패가 아무것도 없는 책상 위에 위풍당당하게 올려져 있었다그 외에도 방 내부는 깔끔했다아직 빼지 않고 있던 윤기방의 서적들을 남준이 여기로 바로 보냈는지 책장도 꽉꽉 채워진 채 정리되어 있었다만족스러운 얼굴로 방을 둘러본 윤기가 직원에게 고생했다는 인사를 건넸다.


  직원이 돌아가고 혼자 남은 윤기는 책상을 툭툭 두드리며 구석구석을 살펴보며 짐을 어디에 어떻게 놓을지 모든 계산을 맞췄다자신의 가상 인테리어 마음에 들었는지 흡족한 미소를 지은 채 윤기는 방을 나섰다.




  강의가 끝났는지 복도는 처음 건물에 들어왔을 때보다 조금 더 소란스러워져 있었다막무가내라면 막무가내일 수 있는 자신의 조건이 받아들여지고 방도 마음에 들었고 교육원 측에서 제시했던 조건도 나쁘지 않았기에 윤기는 지금 기분이 매우 좋았다진작에 병원 같은 거 때려치웠어야 했는데.


  겉보기엔 뚱해 보이는 표정이었지만 내적으론 매우 신난 상태였던 윤기는 정신을 빼놓고 걷다가 이쪽으로 뛰어오는 소리에 놀라 눈을 크게 뜨고 앞을 바라봤다남학생 한 명이 무서운 속도로 복도를 질주하고 있었다어디서 본 것 같은 장면에 윤기의 입이 멍청하게 벌어졌다어디서 봤더라고개를 갸웃하는 순간에도 남학생은 가까워지고 있었다부산역이 기억의 잔상의 출처를 찾아냈을 때 남학생과 윤기의 거리는 불과 다섯 발자국 남짓한 거리였다.


  아부딪힌다.

  그렇게 생각하기 무섭게 서로의 왼쪽 어깨가 맞닿았다세게 부딪힌 것은 아니었으나 멍청하게 서 있던 윤기의 마른 다리가 휘청거렸고 달려오던 남학생 또한 예상치 못한 장애물과의 충돌에 공중에서 팔을 허우적거렸다.


  “어어어!”


  팔을 휘적이며 몇 걸음 더 달려나간 남학생은 다행히도 땅에 얼굴을 처박는 사태는 면한 모양이었다자리에 멈추자마자 스프링이 튕기듯 뒤를 풀쩍 돈 남학생이 허리를 접어 인사했다.


  “죄송합니다안 다치셨어요?”


  그렇게 물으며 고개를 드는 얼굴이 어딘가 낯이 익은 것도 같았다유심히 말랑해 보이는 얼굴을 바라보던 윤기가 고개를 갸웃거렸다대체 어디서 봤더라분명히 낯이 익은데심각한 표정으로 고민하는 윤기의 얼굴이 부딪힌 어깨가 아픈 것으로 착각했는지 남학생이 울상이 되어 다가왔다.


  “어깨가 아프세요?”


  윤기는 됐다는 뜻으로 손을 휘휘 저어 보였지만 남학생은 걱정된다는 얼굴로 윤기의 팔을 붙잡았다.


  “의무실이라도 가보실래요?”

  “!”

  “아프세요?”


  자신의 팔을 붙잡고 걱정스럽게 묻는 얼굴을 보니 떠오르는 게 하나 있긴 했다그러니까 눈앞의 남학생은 병원에 나가지 않던 한 달의 시간 동안 어디선가 술을 진탕 먹고 거리를 지날 때 인형 뽑기 기계 안에서 자신을 얄미운 얼굴로 쳐다보던 노란 병아리 인형과 닮아있었다.


  낯이 익은 이유를 알아내자 가려운 곳을 누가 긁어준 것처럼 시원해서 탄성을 내뱉은 것이었는데 그걸 아파서 그런 거라 오해한 듯 윤기를 잡아끄는 손이 제법 매서웠다.


  “학생?”

  “박지민이라고 합니다.”

  “그래지민학생다친 거 아니니 걱정 안 해도 됩니다.”

  “그래도 방금 아파서 그러신 거 아니에요?”

  “아니 그건계속 답이 안 나오던 게 있었는데 갑자기 생각이 나서 그런거고안 다쳤으니까 급해 보이는데 가던 길 가세요.”

  “맞다그럼 가보겠습니다아프면 저 찾아오세요!”


  남학생지민은 급히 달려가던 용건이 생각난 듯 붙잡고 있던 윤기의 팔을 놓고 팔을 휙휙 흔들며 뛰어갔다네가 누군 줄 알고 널 찾아가며 찾아가면 뭘 어떻게 해주겠단 건지 당최 알 수 없었지만지금 윤기는 기분이 좋은 상태이기도 했고 딱히 화가 난 것도 아니었기에 그 이름은 금세 기억에서 잊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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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민이가 거의 나오지 않았지만 슈짐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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